천태종의 역사
대한불교천태종 역사 대해 알려 드립니다.
한국천태종
한국천태종의 원류

우리나라의 천태종은 고려 숙종 2년(1097)에 대각국사께서 개경(開京)에 창건한 국청사(國淸寺)에서 천태교관을 강의한 것을 개종(開宗)의 기원으로 삼으나, 천태교의는 이미 그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어 활발히 유포되었다. 신라의 현광(玄光)법사는 중국에 건너가서 남악(南岳) 혜사대사(慧思大師)의 가르침을 받고 법화삼매를 증득하고서 귀국하여 대중을 모아놓고 소증(所證)의 법문을 전해서 그 문하에 깨달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파야(波若)법사는 수(隋)의 개황(開皇) 16년(596) 법을 구해 중국에 들어가 천태지자대사를 모시고 공부하여 얼마 안되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그리고 지자대사의 지시로 천태산 화정봉(華頂峯)에 올라가서 16년 동안 수행하고 대업(大業) 9년(613) 2월에 비로소 하산하여 불롱사(佛 寺)에 머물다가 곧 국청사(國淸寺)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 신라의 연광(緣光)법사가 지자대사의 강하에서 수학하였고,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등 3인이 중국 천태 제 5 조인 좌계현랑(左溪玄朗)대사의 강하에서 연찬하고 당의 개원(開元) 18년(730)에 세사람이 함께 법을 전지하여 본국에 돌아와서 전법하였다고 한다.

음에 제관(諦觀)법사는 국내에서보다 송(宋)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 당시 중국 불교 사정은 당무종(唐武宗)의 폐불(廢佛)과 주세종(周世宗)의 배불(排佛) 등의 법난을 겪고 또 5대의 병란 때문에 불전(佛典)은 분실되고 사탑(寺塔)은 파괴되었다. 특히 천태장소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강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천태교학이 쇠미하였다. 그래서 이를 개탄한 누계의적(螺溪義寂)대사의 권유로 오월왕전숙(吳越王錢澁)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천태전적(天台典籍)을 구하였다.

고려 광종(光宗) 11년(960)에 제관법사가 왕명을 받들어 많은 천태종 문헌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가 전해주었다. 이것이 송나라 천태종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제관법사는 중국에서 머문지 10년, 유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1권을 남기고 그곳에서 입적하셨다. 천태사교의는 천태교의의 강요(綱要)를 가르쳐보인 천태종의 입문서로서 중국ㆍ한국ㆍ일본 천태종에서는 필수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고려천태종개립의 유서

민지(閔漬)가 지은 국청사 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釋迦如來舍利靈異記)에 의하면,「태조가 창업할 적에 호종(護從)하던 네 법사 능긍(能兢) 등이 상서하기를대당국(大唐國)에 회삼귀일의 묘법연화경과 천태지자대사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이 있으니 성군(聖君 : 왕건태조를 가리킴)이 삼한(三韓 後三國을 가리킴)을 통합하여 일국을 이룩한 것과 풍토가 서로 합치됩니다.

만일 이 법을 구하여 유행(流行)케 하면 곧 후사(後嗣)의 용손(龍孫)이 수명이 연장하고 왕업(王業)이 끊어지지 않으며 항상 일가(一家)가 되리다」라고 하자 「태조는 그것에 찬동하여 그대로 하려 하였으나, 그 사람을 얻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더니, 선종(宣宗)에 이르러서 대각국사가 송에 들어가서 법을 구한 뒤에 비로소 천태 육산(六山)을 세우는데 땅을 송산(松山) 서남쪽에 점득하고 절을 세워 국청사(國淸寺)라 하고 육산의 근본을 삼았다.」고하였다. 왕건 태조가 건국할 적에 삼한(후삼국)을 통합하여 일국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법화의 회삼귀일사상과 천태의 일심삼관 종지와 같으므로 법화천태교를 세워서 국운융창을 기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선종 때에 대각국사가 그 뜻을 받들어서 입송구법(入宋求法)하여 천태교관을 받아와 천태종을 일으켰다는 사연이다.

대각국사의 행장

고려 천태종의 개조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의 명(名)은 후(煦), 자(字)는 의천(義天)이며, 문종(文宗)의 제 4 왕자이다. 문종 9년(1055) 9월 28일 탄생한 국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칭송을 받았다. 국사는 부왕(父王)의 뜻을 받들어 11세에 출가하여 문종 19년(1065) 5월 14일 경덕(景德)국사를 스승으로 득도하고 경덕국사와 같이 영통사(靈通寺)에서 수업하였다.

그해 10월에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고 학문에 전심하여 대ㆍ소승경론(大ㆍ小乘經論)을 통달하고 유서(儒書) 사기(史記)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설에 이르기까지 두루 익혔다. 특히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깊이 궁구하고 도덕과 계행이 매우높았으며, 문종21년 7월 13세 때에 우세승통(祐世僧統)의 지위에 올랐다.스승 경덕(景德)국사가 입적한 뒤에는 31세의 약관(弱冠)으로서 그 학도들을 맡아 강학을 하여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의 불교계는 여러 교종(敎宗)과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있었는데, 교종은 이론에만 치중하여 실천과 수행을 등한이 하고, 선종에서는 경ㆍ론(經ㆍ論)의 교리를 무시하고 교외별전(敎外別傳)만을 주장함으로써 교문과 선문이 대립하여 서로 담을 쌓고 시비상쟁(是非相諍)을 일삼았다. 이에 대하여 국사는 선(禪)과 교(敎)를 융섭하고 정혜(定慧)를 쌍수하는 것이 가장 긴요함을 깨닫고서 당시 활기를 잃은 교계에 새바람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문종(文宗)에게 입송구법(入宋求法)을 청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유를 들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공식으로는 입송(入宋)하기가 불가능함을 알고 국사께선 선종 2년(1085) 6월 7일에 제자 수개(壽介) 등 2인을 대동하고 미복(微服)으로 송나라 상선(商船)에 편승하여 입송길에 올랐다.

국사께서 송의 밀주(密州 山東半島)에 도착하여 입국의 사유를 송제(宋帝)에게 올리니, 송제 철종(哲宗)이 객례(客禮)로써 맞아 들여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며,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도록 하고, 화엄학의 대가인 유성(有誠)법사를 추천하여 서로 법을 문답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선종ㆍ화엄종ㆍ율종ㆍ법상종 등 당시 중국 여러 종파의 이름 있는 고승 석학 50여명을 순방하며 교의를 담론하니 모두가 국사의 구법의 열성에 감격하였다.

남방의 항주전당(杭州錢塘)에 가서는 유명한 천태종 자변종간법사(天台宗慈辯從諫法師)를 심방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의 강설을 받았으며 자변종간법사는 당시 천태종의 가장 이름높은 고승이었다.
다시 화엄종장(華嚴宗匠)인 정원(淨源)법사에게 가서 화엄교의를 논하였다. 특히 화엄과 천태의 교판(敎判)상 같고 다른 점에 대하여 깊이 담론하였다.다음에 국사께선 천태산(浙江省台州府소재)에 올라가서 지자대사탑을 참배하고 발원문을 봉정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서 천태교학을 선양할 것을 서원하였다.

그 발원문에서 「일찍이 듣자오니 대사께서 5시 8교로써 동(東)으로 전해온 일대성언(一代聖言:경전을 가리킴)을 판단하여 남음이 없었습니다. 본국에는 옛적에 제관법사(諦觀法師)가 교관(敎觀)을 전해 얻었는데 지금은 그 배움이 끊어졌습니다. 내가 발분망식하고 이미 전당자변(錢塘慈辯) 강하에서 교관을 받아지녔는 바 후일에 고국에 돌아가면 목숨을 받쳐 선양하겠습니다.」라고 서원했다. 이것은 대각국사의 고려 천태종 개종의 선언이라고 하겠다.

고려천태종의 개립

고려 천태종의 개조 대각국사(大覺國師 1055∼1101)의 명(名)은 후(煦), 자(字)는 의천(義天)이며, 문종(文宗)의 제 4 왕자이다. 문종 9년(1055) 9월 28일 탄생한 국사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칭송을 받았다. 국사는 부왕(父王)의 뜻을 받들어 11세에 출가하여 문종 19년(1065) 5월 14일 경덕(景德)국사를 스승으로 득도하고 경덕국사와 같이 영통사(靈通寺)에서 수업하였다.

대각국사께서 송나라에 들어간지 1년 2개월이 된 선종(宣宗) 3년 6월에 불교경전의 장소 3000여권을 구득하여 귀국했다. 선봉사(仙鳳寺) 대각국사비에 의하면 국사가 귀국하자, 선종소속의 덕린(德麟)ㆍ익종(翼宗)ㆍ경란(景蘭)ㆍ연묘(連妙) 등 여러 운 수납자와 학승이 국사의 강하에 와서 천태의 교관(敎觀)을 듣고 개종하여 제자가 되었다.
인예태후(仁睿太后 대각국사의 모후)는 일찍이 뜻한 바 있어, 송도 서남쪽에 터를 잡고 큰 절을 창건하다가 준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숙종(肅宗국사의 셋째 형)이 즉위하여 공사를 마치고 국청사(國淸寺)라 명하고 국사를 주지로 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강설케 하였다.

국사는 그 개강사(開講辭)에서「생각컨대 우리 동국에 불법이 전한지 7백여년에 비록 여러 종이 다투어 연양(演揚)되었으나, 천태일종(天台一宗)이 천명되지 않았다. 옛적에 원효보살이 앞서서 찬양하였고 제관법사는 뒤에 선양하였지만 인연이 성숙되지 않아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도다. 교법의 유통됨이 그 기다림이 있는 듯 하도다」라고 하였다.

또한 인예태후가 국청사를 창건하던 내력과 국사가 바다를 건너가 구법하던 일, 천태교관을 전해받고 천태지자대사 탑하에서 발원한 일, 그리고 이제는 평생의 뜻을 펴게되었다는것을 피력하였다. 국사께선 세수 47세라는 짧은 생애이지만 천태종을 개종한 그의 업적은 매우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천태종이란, 법화경의「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 )」등의 사상을 중심으로 중국 불교의 혜성인 지자(智者)대사에 의하여 개창된 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천태교학이 전래되어 연구와 신앙이 많았으며, 고려에 와서는 고려초에 능긍(能兢) 등이 천태종의 개창을 태조에게 주창한 바 있었고, 제관(諦觀)법사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어 교학적 연구로 유명 하다. 그러나 국사 이전까지는 교학으로서 연구되었을 뿐 한 종파로서는 성립 되지 못하다가 국사에 의하여 숙종2년(1097)에 개종을 하게 된 것이다.

국사께서 천태종을 개종한 것은 단순히 한 종파를 세우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종(諸宗)의 융섭에 있었다. 그러므로 국사께서 천태종을 개립한 본의는 고려불교의 화합과 융섭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다시말하면 종래 국내에 있었던 제종파를 가지고서는 그 대립분쟁을 지양하게 할 수 없기에, 천태종을 개립하여 그「회삼귀일」의 통일적 교지로써 고려불교의 융합적인 개조를 기도하고 이것으로써 국민사상의 귀착점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개립된 고려천태종은 고려불교의 중심이 되어 선ㆍ교제종의 화합을 이루어 왔던 것이다.

법통의 개승과 교세

대각국사께서 천태종을 개종한지 5년만에 별세하였으므로 더많은 교화를 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문하에 기라성 같은 용상대덕 수 백명과 문인 제자 수천명이 각기 천태교의 선양에 힘썼다. 국사의 법손으로는 이른바 승통(僧統)6인, 수좌(首座)21인, 삼중대사21인,중대사(重大師)96인, 대사14인, 대덕(大德)10인이있었다 한다. 천태종이 개종된지 백여년 뒤에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의 양파로 갈라졌다.
소자종(疏字宗)은 천태3대부(天台三大部)를 비롯한 모든 천태교전을 연구하고 이론적으로 강설하여 밝혔던 종파로서 근본도량인 국청사와 개성의 묘련사(妙蓮寺)를 그 본사로 하였던 것이다.

국청사는 대각국사의 모후인 인예태우의 발원으로 창건되었고, 묘련사는 충렬왕(忠烈王)이 그 후비인 제국대장공주(濟國大長公主)와 발원하니 국왕21년에 창건하고 원혜국통(圓慧國統)을 맞아 법주로 삼고서 천태교전을 강하였다. 그 뒤로 원혜국통의 법사(法嗣)인 무외(無畏)국통과 그 문인 의선대선사(義旋大禪師)등이 법석을 주재해 나갔다.

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은 전라남도 강진의 만덕산백련사(萬德山白蓮社)를 그 근본 도량으로 하였다고 한다. 법사종은 천태교전을 강하여 밝히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3부의 하나인 관보현경(觀普賢經)에 의하여 보현도량을 결사(結社)하고 법화삼매와 보현참법을 닦는 실천을 주로 하는 종파였다.

원묘국사요세(圓妙國師了世=1165 - 1245)는 백련사(白蓮社)를 창건하고 보현도량개설의 법주로서 도행이 매우 탁월하고 실천수행에 주력함으로써 왕ㆍ공 귀족과 4부대중의 많은 숭앙을 받아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제자가 38인이요,학인이 2백여인이 있었는데, 제 2세법주의 계승자로 정명국사 천인(瀞明國師天因)을 지명 하였으며, 그 뒤로 원환국사(圓환國師), 진정국사(眞瀞國暇), 정조대사(瀞照大師)에로 전하여 그 교세는 매우 융성하였다.

이와 같이 천태종 개종이래 고려말에 이르도록 국가의 융숭한 외호를 받았을뿐 아니라, 고승대덕이 속출하여 천태종지를 크게 선양 하였으므로 교세가 찬연하게 발전하여 고려중엽 이후 불교계 중심세력이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유학자 중심으로 새 왕조를 건설함에 따라 유교를 정교(政敎)의 지도이념으로 하고서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을썼다.

태종2년에 전국사찰을 감축하고 태종7년(1407)에는 당시의 11개종파를 7종(宗)으로 통합시켰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인 세종6년(1424)에는 7개종파를 다시 선ㆍ교(禪敎)양종으로 통합시켰는데, 그때 천태종과 조계종과 총남종(摠南宗)을 합하여 선종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천태종이란 종명은 역사의 겁화속으로 사라졌다.

천태종의 중창
천태종 중창의 이념

오랜 유서와 빛난 전통 그리고 심오한 교의와 사상을 지닌 천태종이 역사의 비운(悲運)속에서 지하에 은몰된지 5백여년이 지나 이땅에 다시 세워지고, 그 종풍과 교세가 경이적으로 선양되고 발전해 가고 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필연(必然)의 인연이 도래한 것이라고 하겠다.
천태종의 근본종지(根本宗旨)는 일승 묘법의 교의를 근본으로 하여 불성(佛性)의 보편과 존엄을 스스로 믿고 자각각타(自覺覺他)의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여 안으로 자아완성(自我完成)을 기하고 밖으로 사회의 정화와 각화(覺化)로써 일체중생개성불(一切衆生皆成佛)과 불국토건설(佛國土建設)을 실현하는데 있다.

그리고 처염상정(處染常淨)과 진속원융(眞俗圓融)의 법화교지(法華敎旨)에 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이룩하고, 일심삼관(一心三觀), 이념삼천(一念三千)의 진리관으로 다같이 밝은 자아 즉 광명불성(光明佛性)을 개현케 하는 데있다.

마치 연꽃이 흙탕물 속에서 물들지 않고 향기롭고 청초한 모습을 나타내듯이 모든 말법중생으로 하여금 실상묘법(實相妙法)의 진리문에 들게 하여 오탁과 십악의 사회속에서 보리(菩提)의 공덕을 성취케하여 스스로 참되고 밝은 생활을 창조하고 나아가서 사회를 정화하여 죄악과 모순이 없는 정복(淨福)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각국사께서 국민정신의 귀일과 고려불교의 흉륭을 위하여 천태종을 개립했듯이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 이상과 같은 종지와 이념을 띠고 천태종이 다시 세워진 것은 실로 그 의의가 지대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 종단이 성립되고 발전하는데는 몇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 즉 종지(宗旨), 종통(宗統)과 개산조(開山祖)의 인격, 법력과 근본신행도량(根本信行道揚)인 총본산(總本山)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 종(宗)의 체제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의 한국천태종은 최상승(最上乘)인 종지와 찬연한 종통, 개산조인 상월대조사의 투철한 교화이념과 탁월한 감화력, 장엄한 대사찰인 총본산 구인사,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종도등 제 요소를 수승하게 확립하고 있다.

중장조 상월원각 대조사님 생애와 사상

대조사님의 속성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이고본명은 준동(準東)이며 법휘(法諱)는 상월(上月), 의호(懿號)는 원각(圓覺)이다. 신해년(1911) 음 11월 28일에 강원도 삼척에서 2대독자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두뇌가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서 15세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셨다.
15세 때에 불문(佛門)에 득도하여 경ㆍ율ㆍ논 삼장(三藏)을 참구하신지 수년에 대조사님께서 불법의 근본 가르침이 경문을 알고 이해하는데 있지않고 자성(自性)을 밝히는데 있음을 깨닫고 명산과 승지(勝地)를 찾아가 폐침망식(廢寢忘食)하면서 지관(止觀)을 닦아 오셨다. 그리고 견문을 넓히고자 운수납자(雲水衲者)로 중국에 들어가 천태산국청사(天台山國淸寺)와 오대산문수도량(五臺山文殊道場)과 보타낙가산(普陀洛伽山) 관음영장(觀音靈場)등을 순례하고 서장(西藏)까지 편력하며 만행(萬行)을 닦으시었다.

대조사님께서 8ㆍ15광복을 전후하여 깊이 뜻하신 바가 있어 국내 여러 명산승지를 두루 답사하시다가 소백산 구봉팔문 하의 연화지(蓮華地)에 이르러 초암(草庵)을 얽고 불석신명(不惜身命)으로 각고정진을 하여 오셨다. 동족상잔의 6ㆍ25동란 중에는 대조사님께서 주로 마곡사(痲谷寺)와 공주지방에서 난민(難民)들과 더불어 지내오시면서, 전진(戰塵)중에도 무외(無畏), 무애(無碍)의 법력과 자비행으로 많은 사람을 구제하셨다.

공산군이 격퇴된 후 대조사님께서 전화(戰禍)로 소실된 초암을 다시 얽고 천태지관법(天台止觀法)을 수증하면서 만경구적(萬境俱寂)의 공삼매(空三昧)를 체인(體印)하고 임인년(1962) 음 12월 28일 활연대오하여 삼관묘제(三觀妙諦)의 무상대도를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산색고금외(山色古今外)
수성유무중(水聲有無中)
일견파만겁(一見破萬劫)
성공시불모(性空是佛母)
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었다.

상월대조사님께서 소백산에 입산하시어 새도량을 개설하시고 각고정진하실때에 몇가지의 큰 서원이 있었다. 그 서원이란 「기필코 큰 법을 성취하고 이곳에서 새 불교운동과 큰 불사를 일으키겠다. 기필코 반야지혜와 무애해탈을 증득하지 않고서는 사회와 대중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기필코 스스로 성취한 공덕은 만중생에게 회향하여 다함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조사님의 불퇴전의 구도정신과 새 불교, 새 신앙운동의 염원과 광도중생의 대원을 알수 있는 것이다. 대조사님께서는 근세이래 국민정신의 바탕이 무너진 사상계의 혼미와 정법의 퇴상을 개탄하시고, 특히 이기적 편집(偏執)과 대립, 갈등, 분열을 일삼아 오는 불교계 상황에 큰 회의(懷疑)를 품어 오셨다. 이에 묘법의 위신력과 불교의 참면목(眞面目)을 세우고자 염원을 굳게하셨다.

소백산 유곡에서 대도성취를 위한 수도에만 전념해 오신 대조사님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1963년경부터 였다. 대조사님의 법력과 자비구제력의 향기가 사방에 퍼지자 전국각지에서 그 문하에 귀의하는 제자와 신자가 날로 격증하였다. 그 도풍덕화(道風德化)와 자재(自在)한 구제력은 참으로 부사의(不思議)하였다.

중생의 고뇌는 가지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중생들을 응병여약(應炳與藥)격으로 제도함으로써 삶의 의욕을 잃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절망과 어둠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광명을 주었던 것이다.그래서 「부처님의 법만은 우리를 지키고 선도하며 구제한다. 불법은 누구이든차별하지 않으며 바로 믿으면 삶의 기쁨을 얻는다.」라는 확신을 누구나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인연으로 구인사를 다녀간 이는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었고, 공경하는 마음 진실한 마음으로 불법과 대조사님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으며, 지난날의 잘못되었던 생활을 참회하며 지극지성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구인사는 일체중생이 자비로 구제되는 영험의 도량이 되고, 인간개조, 진리의 감로도량으로 승화되어 왔으며, 대조사님의 자재한 법력과 자비 구제력에 누구나 감모열복(感慕悅服)하였다.

천태종의 중창

삼관묘제(三觀妙諦)의 진리를 체인(體印)하신 대조사님께서 일찍이 여러 경전을 참구하시면서 법화경(法華經)이 경(經)가운데 최상승경(最上乘經)이며 천태종의(天台宗義)가 심현(深玄)한 교리임을 깊이 인식하셨다. 그리고 이 법화경의 가르침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천태종의(天台宗義)가 대승불교의 진수이며,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의 3 승(乘)과 모든 중생을 성불(成佛)의 길로 들게하는 일승묘법으로서, 오늘의 말법(末法)중생을 교화하는 최상종승(宗乘)임을 사무쳐 보셨다.
그리하여 이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는 천태종을 다시 세워 참신한 교화문을 열기로 결심하셨다. 천태종은 그 연원이 깊고 종통(宗統)이 빛날뿐 아니라, 고려불교를 중흥하고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거양한 종(宗)으로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천태교의가 오늘의 국가 현실과 교계상황에 비추어 요망되고 최적(最適)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일 신도가 소백산 구인사에 운집하고, 교세가 전국각지로 신장(伸長)하게되자, 이미 법연(法緣)이 도래함을 아신 대조사님께서 흥법호국(興法護國)과 구세제중(救世濟衆)의 사명감을 굳게 하셨다.

조선조(朝鮮朝)이래 쇠잔(衰殘)을 거듭해 온 우리나라 불교를 획기적으로 흥륭함으로써 민족정신문화를 부흥하고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정법호국의 과업을 수행하며,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과 무너진 도의의 재건과 혼탁한 사회의 정화로써 국토의 정토화, 중생의 보살화를 이룩하고자 염원하신 것이다.

대조사님께서 이러한 사명감과 염원을 실천 구현하기 위하여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 생활화의 이념아래, 새 신앙운동을 전개하여 오셨다. 그 실천 지표는 사회적 대중불교, 신행적 수복(修福)불교, 실천적 생활불교, 실질적 애국불교, 이타적 구세불교를 구현하는데 있었다. 즉 종래의 소승적 둔세(遁世)불교, 출가 중심적 산간(山間)불교, 미신적 기복불교, 소비적 유한 불교의 구각을 탈피하여 불교를 사회와 민중 속에 심어 국민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며, 생활 속에서 신행하는 불교, 즉 생활즉신앙(生活卽信仰), 신앙즉생활(信仰卽生活)이 되게 하고, 그리고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불교를 세우는데 있었다.

근세 이래 여러 선지식과 불교지도자들이 불교의 혁신과 중흥, 대중불교의 건립을 구두선처럼 외쳤으나 실제로 실천에 옮기거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은데, 대조사님께서는 이 어려운 시대적 과업을 실현에 옮기시고 수행(遂行)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실로 대도를 성취하신 대조사님의 묘지력(妙智力), 그 투철한 불교관과 대승적인 구제정신, 그리고 참신한 교화이념과 정법중흥의 확고한 신념이 천태종 중창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1966년 8월 15일 천태종의 중창(重創)을 선언하고 종의회ㆍ총무원 등을 구성하고서 1967년 1월 24일자로 당시의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 정부에 등록됨으로써 천태일승의 묘법이 다시 그 광휘를 발하게 된 것이다. 고려 대각국사께서 개종(開宗)한지 871년이 되며, 조선조 세종왕 6년에 폐종된 지 544년이 되는것이다.

천태종 중창선언문에서 「일찍이 대각국사께서 태조(太祖) 천태지자대사 탑전에서 큰 서원을 세우시고 귀국하신 뒤 고려 천태종을 개립하시고,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최상종승으로 당시에 퇴폐(頹廢)한 선교(禪敎)의 기풍을 새로 진작(振作)하고, 교계의 혼미를 쇄신하며 전 교계를 통섭영도하여 불교중흥을 이룩하였거니와, 이제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실상묘법(實相妙法)은 인연따라 다시 이 강토에 감로법우(甘露法雨)를 뿌릴 때가 되었다.

이에 오랫동안 역사의 진토속에 묻혔던 신성한 천태일승대도(天台一乘大道)를 발굴 하여 민족정신문화 부흥과 불국토 건설에 이바지 하고자 천태종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저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미묘하고 향결한 빛을 나타내듯이 이 실상묘법(實相妙法)에 귀의하는 말법중생들은 이 묘법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오탁(濁)의 진창과 10악(惡)의 흙탕물에서 보리공덕(菩提功德)을 성취하고 스스로 참되고 밝은 생활을 창조하며, 나아가 온 인류를 각화정화(覺化淨化)하여 모순과 죄악이 없는 이상사회를 실현할 것을 서원할 지어다.」고 하셨다.

대조사님께서 종단의 종무전반을 친히 통어(統御)하시고 전법도생(傳法度生)과 지속적인 불사확장 등으로 영일((寧日)이 없이 실로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진을 하시다가 세속인연이 다함을 아시고서 제불불출세(諸佛不出世)/역무유열반(亦無有涅槃)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지 않았고 또한 열반에 든 것도 없도다.

생사본공적(生死本空寂)/영허일월륜(盈墟一有輪)나고 죽음이 본디 텅 비었으니, 찾다가 비우는 것이 한 달 바퀴로다. 라는 열반게(涅槃偈)를 남기시고, 1974년 음 4월 27일에 홀연히 입적하셨다. 이「열반게」의 요의는 나고 죽음이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없는 법신열반(法身涅槃)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다. 이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닫고 보면 생사와 열반에 구애되지 않는 대자유 대자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대조사님께서 그 생애에 나투신 공덕은 실로 무량하여 오늘의 불교계와 모든 불자에게 큰 교훈과 빛을 주고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확고한 교화이념으로 종지, 종통의 연원이 깊은 천태종을 다시 세워 종풍을 크게 선양하고 종단발전의 기반을 확립하셨다.

둘째, 많은 고뇌중생을 제도하여 불법교해에로 인도하고 안락을 얻게 하셨다.

셋째, 불교신앙을 대중화하여 불교를 사회와 민중 속에 심고 무너져가는 정신생활의 부흥을 창도하셨다.

넷째, 오늘의 우리 불교가 나아갈 방향과 시대적 사명을 밝혀 오셨다. 대조사님께서는 불교의 중층으로 불교가 제위치를 찾야하고,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섯째, 수행 불교의 종풍을 세워 오셨다. 초심자일지라도 스스로 기도하고 염불ㆍ선정을 닦게 하셨다.

여섯째,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생산적인 불교의 확립과 사회복지를 위한 불교를 세워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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